47. 신대륙의 노예 무역 :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의 강제 이주
신대륙의 노예 무역 :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의 강제 이주
*인류의 안타깝고 비극적인 사건에 대하여 '물류'라는 단어를 쓴것은 사람을 마치 물건으로 본다의 개념이 아니라 사람과 물건이 새로운 대륙으로 흐르면서 문명이 형성되고 사회를 이루는 측면에서의 활용이오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대서양 노예 무역은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강제 이주였으며, 약 366년 동안 1,25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강제 운송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약 1,100만 명만이 생존하여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이 대규모 인신매매는 복잡한 물류 체계를 통해 운영되었으며, 아프리카 내륙에서의 포획부터 대서양 횡단,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인신판매와 분배까지 다양한 단계를 포함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의 노예 무역 물류 체계를 상세히 분석하고, 이 잔혹한 인신매매의 다양한 측면과 물류분야에 대한 영향을 살펴보겠습니다.
대서양 노예 무역의 역사적 배경과 규모
대서양 노예 무역은 16세기 중반부터 1860년대까지 이어진 비극적인 역사였습니다. 이 무역은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서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을 강제로 포획하여 카리브해 지역, 북미, 중남미로 강제 이주시키는 잔인한 과정이었습니다. 이러한 무역의 시작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 확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설탕 플랜테이션이 세워진 후, 유럽 플랜터들은 대규모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 노예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6세기와 17세기 초반 대서양 노예 무역을 주도했습니다. 1640년까지 리스본, 세비야, 카디스와 같은 이베리아 항구들은 유럽에서 출발한 노예선의 압도적인 97%를 차지하며, 약 5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스페인령 아메리카로 운송했습니다. 초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스페인으로 데려온 노예들을 다시 신대륙으로 이송하는 방식이었지만, 1530년대부터 무역 방식이 전환되어 이베리아 선박들이 직접 아프리카 해안을 방문해 노예를 확보한 후 아메리카로 항해하기 시작했습니다.
1545년 이후 스페인이 다른 국가들과 아시엔토(Asiento) 협정을 맺으면서 대서양 노예 무역의 양상이 다시 변화했습니다. 이 협정으로 스페인 식민지로의 노예 수송이 다른 국가들에게도 허용되었고,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활동 영역이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17세기 중반부터는 영국의 해상 및 상업적 힘이 급성장하면서 북대서양에서 대규모 영국 대서양 노예 무역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대서양 노예 무역의 90%는 브라질,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네덜란드 선박들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영국 항구들(리버풀, 런던, 브리스톨 등)에서 전체 노예 항해의 거의 3분의 1이 준비되었고, 프랑스 선박은 라로쉘, 르아브르, 보르도, 낭트 등의 항구에서 출발하여 전체의 약 13%를 차지했습니다.
리버풀의 규모만 보더라도 그 참혹함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1696년부터 1807년(영국이 노예 무역을 공식 폐지한 해)까지 리버풀 상인들은 약 130만 명의 아프리카인을 강제로 수송했습니다. 그중 18만 명은 '중간 항로'(Middle Passage)라 불리는 대서양 횡단 과정에서 비참하게 사망했습니다.
노예 수급 체계: 아프리카 내륙에서 해안까지
대서양 노예 무역을 위한 아프리카인의 포획과 해안으로의 이동은 매우 정교한 물류 체계를 통해 진행되었습니다. 유럽 및 아메리카 상인들은 아프리카 내륙에서 포획된 사람들을 해안에서 구매했으며, 이 과정에서 아프리카 내부에 광범위한 노예 무역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세네감비아 지역(대서양 노예 무역에서 포획된 전체 노예의 6%를 공급)의 노예들은 세네갈 강과 감비아 강이 흐르는 해안 지역부터 푸타 토로, 푸타 분두, 푸타 잘론 같은 산악 지대와 더 동쪽의 사헬 지역까지 광범위한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왔습니다. 세네감비아에서는 75만 명 이상의 포로를 육지와 수로로 운송하기 위해 식량과 물자를 공급하는 상인 시스템이 필요했습니다.
골드 코스트를 따라(전체 대서양 노예의 10%를 공급), 수십 개의 유럽 요새와 공장들이 노예 시장에 접근했으며, 이들 노예는 사헬 지역(현재의 부르키나 파소)에서부터 시작해 여러 중개인을 통해 판매되고 운송된 후에야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중앙아프리카에서는(전체 대서양 노예의 거의 절반이 이곳에서 나옴) 루안다나 콩고 강을 따라 선박에 강제로 실린 사람들이 점점 더 먼 내륙 지역에서 왔습니다. 카빈다와 로앙고 대서양 항구에서 판매된 사람들도 긴 거리를 이동했으며, 이들의 내륙 이동은 상아나 소금 같은 지역 보조 무역과 연결되거나, 더 나아가 해안에서 교환되어 동쪽으로 운송된 유럽 상품의 도착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노예의 포획은 전쟁, 납치, 사법적 처벌, 부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럽 노예 상인들의 수요로 인해 아프리카 내 노예제도가 급격히 확대되었고, 이로 인해 광범위한 사회적 혼란과 동요가 발생했습니다[19]. 포획된 아프리카인들은 해안으로 이동하기 전에 이미 극심한 고난의 통과 의례를 겪었습니다. 초기 포획 후, 아프리카 노예 상인들은 그들을 주별로 다른 아프리카 사회를 통해, 낯선 땅과 문화를 지나 해안에 도착할 때까지 전달했습니다. 일부는 해안까지 몇 마일만 행진했지만, 다른 이들은 수백 마일을 강제로 행진해야 했습니다. 밧줄, 사슬, 나무 멍에로 묶인 아프리카 남성, 여성, 어린이들에게 이 여정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19].
경우에 따라서는 포획부터 해안까지의 여정 중 사망률이 중간 항로 자체보다 더 높을 수도 있었습니다. 일부 추정에 따르면 포획 과정, 강제 행진, 그리고 해안 도착 전 구금 상태에서 전체 포획된 사람들의 약 50%가 사망했다고 합니다[18].
노예 무역의 삼각 무역 시스템
대서양 노예 무역은 삼각 무역 시스템의 일부로 운영되었습니다. 삼각 무역은 세 개의 항구나 지역 사이의 무역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한 지역이 주요 수입원인 지역에서 필요로 하지 않는 수출 상품을 가지고 있을 때 발생합니다[3].
대서양 노예 무역에서의 삼각 무역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사이에서 운영된 3단계 대서양 교환 시스템이었습니다. 유럽 노동자들은 노예선을 준비하고, 무역 회사가 소유한 유럽 제조품을 서아프리카로 선적하여 노예를 획득했으며, 이 노예들을 아메리카, 특히 브라질과 카리브해 섬들로 보냈습니다[3].
첫 번째 단계에서 서아프리카에서 상인들은 유럽 제조품을 지역 노예 상인들과 노예로 교환했습니다. 그런 다음 선원들은 노예들과 남은 유럽 제조품을 아메리카로 운송했으며, 그곳에서 선박 상인들은 노예들과 유럽 제조품을 플랜테이션 소유자들에게 판매했습니다. 이후 상인들은 플랜테이션 소유자들로부터 설탕과 당밀을 구매하고 이를 북미 식민지로 선적했습니다. 북미에서 상인들은 남은 유럽 제조품과 노예, 그리고 플랜테이션에서 온 설탕과 당밀을 지역 구매자들에게 판매한 다음, 유럽에서 판매할 북미 상품(담배, 설탕, 면화, 럼주, 쌀, 목재, 동물 가죽 등)을 구매했습니다[3].
이 무역 시스템은 거래량 측면에서 주로 남미(대부분의 노예가 판매된 곳)와 이루어졌지만, 20세기 연구에서 가르쳐지는 고전적인 예는 식민지 당밀 무역으로, 17세기와 18세기에 서아프리카, 서인도 제도, 그리고 영국 북미 식민지 사이에서 노예, 설탕(종종 당밀 형태로), 그리고 럼주의 순환 무역을 포함했습니다. 이 삼각 무역에서 노예들은 럼주를 양조하는 데 사용되는 설탕을 재배했고, 이 럼주는 다시 더 많은 노예와 교환되었습니다[3].
중간 항로(Middle Passage): 대서양 횡단의 공포
'중간 항로'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노예선에 갇혀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겪은 기간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9]. 이 항해는 날씨 조건에 따라 1개월에서 6개월까지 다양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정은 더 효율적이 되었는데, 16세기 초의 평균 대서양 항해가 몇 개월 걸렸다면, 19세기에는 횡단이 종종 5-7주 미만이 소요되었습니다.
아프리카 국왕, 전쟁 지도자, 개인 납치범들은 포로를 여러 해안 요새를 보유한 유럽인들에게 판매했습니다. 포로들은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이 항구들로 강제 행진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바라쿤(barracoons)이라 불리는 시설에서 유럽이나 아메리카 노예 상인들에게 판매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일반적인 노예선은 약 30명의 승무원과 함께 수백 명의 노예를 태웠습니다.
남성 포로들은 일반적으로 공간을 절약하기 위해 쌍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오른쪽 다리가 다음 사람의 왼쪽 다리에 연결되었고, 여성과 어린이들은 약간 더 많은 공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슬이나 손과 다리 수갑은 빌보스(bilboes)라고 불렸으며, 이는 노예 무역의 많은 도구 중 하나였고, 항상 공급이 부족했습니다. 빌보스는 주로 남성에게 사용되었으며, 두 개의 쇠 족쇄로 구성되어 기둥에 잠겨 있었고 보통 두 남성의 발목에 고정되었습니다.
297톤 무게의 아프리카 선박에서 각 남성 노예에게 허용된 공간은 길이 6피트, 너비 16인치였습니다. 소년들은 각각 5피트×14인치, 여성은 5피트 10인치×16인치, 소녀들은 4피트×1피트의 공간이 허용되었습니다. 갑판 사이의 수직 높이는 5피트 8인치였습니다[6]. 이처럼 매우 제한된 공간에서 노예들은 앉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남성 침실에서는 4열이 아닌 5열로 노예들을 쌓아두기도 했습니다.
최상의 경우에도 포로들은 귀리, 완두콩, 콩, 비스킷, 옥수수, 플랜테인, 쌀을 끓여서 기름과 약간의 후추와 혼합한 음식을 제공받았습니다. 선장의 계획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익숙한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포로들의 생존을 위해 선원들은 신선한 물을 충분히 공급해야 했습니다. 수주 동안 바다에서 생존하기 위해, 배는 종종 포로보다 물통을 운반하는 데 더 많은 공간을 사용했습니다. 물 부족으로 인해 때때로 주요 재앙과 막대한 인명 손실이 노예선에서 발생했습니다.
하루에 한 번 물과 함께 식사가 제공되었습니다(제공된다면). 식량이 부족할 때는 노예 소유자가 노예보다 우선순위를 차지했습니다. 물은 하루에 두세 번, 보통 식사와 함께 엄격하게 배급된 양으로 배급되었으며, 약 반 파인트(약 0.24 리터) 정도였습니다. 날씨가 갑판에 포로들을 그룹으로 데려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음식은 대신 공용 통에 담겨 밀폐된 공간에서 배급되었습니다. 만약 한 아프리카인이 먹기를 원하지 않거나 굶어 자살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인간의 턱을 벌리도록 설계된 가위 모양의 의료 기구를 사용하여 강제로 음식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노예선 갑판 아래에서의 생활 조건은 극도로 열악했습니다. 노예들은 몇 달 동안 비참하고 형언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 살았습니다. 질병이 확산되었고, 질병으로 건강이 악화된 것이 가장 큰 사망 원인이었습니다. 사망률이 높았고, 사망은 갑판 아래의 이 조건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시체는 바다에 던져졌지만, 많은 선원들은 선창에 들어가기를 피했습니다. 이미 아팠던 노예들이 항상 즉시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살아있는 노예들이, 수 시간 때로는 수일 동안 죽은 사람과 함께 족쇄로 묶여 있을 수 있었습니다.
1788년 노예 무역 규제법과 그 영향
18세기 후반, 노예제도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점차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1783년 소송 중에 드러난 참혹한 세부 내용에 깊은 분노를 느꼈습니다. 한 사건에서 선박 소유주들은 살해된 132-142명의 노예에 대한 보험금까지 청구하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퀘이커교도들은 노예 무역 종식을 위해 의회에 적극적으로 청원했으며,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1787년에 비종파적 그룹인 노예 무역 폐지 협회(Society for the Abolition of the Slave Trade)를 결성했고, 영국 국교회 신자들도 이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1788년, 윌리엄 돌벤 경(Sir William Dolben)은 동료 의원들과 함께 템스 강으로 가서 노예 무역을 위해 준비 중인 배에 직접 탑승해 조사했습니다. 돌벤은 이전에 노예제 폐지 협회와 접촉한 바 있었으며, 이번 노예선 방문은 그의 노예 무역 반대 입장을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협회의 끈질긴 캠페인으로 인해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총리는 노예 무역에 대한 공식 조사를 지시했고,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에게 하원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1788년 노예 무역법(Slave Trade Act 1788)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은 영국 선박이 운송할 수 있는 노예의 수를 선박의 톤수에 비례하여 제한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선박은 최대 207톤까지 톤당 1.67명의 노예를 운송할 수 있었고, 그 이후에는 톤당 1명의 노예만 운송할 수 있었습니다. 1788년 법의 규정은 1년 후에 만료되었기 때문에, 의회에서 매년 갱신해야 했습니다.
이 법은 노예 선적을 규제한 최초의 영국 법률이었지만, 완전한 폐지까지는 약 20년의 긴 시간이 더 소요되었습니다. 영국은 결국 1807년에 노예 무역을 폐지했으며,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도 점진적으로 노예 무역을 불법화했습니다.
노예 무역에서의 사망률과 건강 위험
대서양 노예 무역의 사망률은 노예들이 겪은 비인간적인 환경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약 940만에서 1,26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신세계로 강제 이송되었다고 추정합니다. 긴 항해 기간 동안 발생한 질병과 기아가 사망률의 주된 원인이었으며, 특히 아메바성 이질과 괴혈병이 치명적이었습니다. 또한 천연두, 매독, 홍역 등 다양한 질병들이 협소한 선박 공간에서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항해 기간이 길어질수록 사망률도 함께 증가했습니다. 이는 점점 악화되는 식량과 식수 상태, 그리고 장기화되는 해상 체류로 인해 이질과 괴혈병의 발생 위험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중간 항로에서의 사망률은 출발 지역에 따라 크게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비아프라 만(현재의 나이지리아, 카메룬, 가봉 지역) 출발 선박의 사망률은 앙골라 출발 선박보다 120% 높았습니다. 앙골라는 노예 승선이 가장 많았던 단일 지역으로, 서아프리카 평균보다 30%,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전체 평균보다 50% 이상 높은 사망률을 기록했습니다.
심지어 같은 지역 내에서도 인접한 항구 사이에 극적인 사망률 차이가 존재했으며, 이러한 차이는 오랜 기간 지속되었습니다. 이는 노예화 지역의 특성과 내륙 포획 지점에서 항구까지의 거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아프라 만의 올드 칼라바(Old Calabar)에서 출발한 선박의 사망률은 니제르 강의 보니(Bonny)에서 출발한 선박보다 훨씬 높았는데, 두 항구는 불과 75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콩고 강 북쪽의 로앙고(Loango), 카빈다(Cabinda), 말렘보(Malembo)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관찰되었으며, 로앙고 출발 선박의 사망 위험은 카빈다나 말렘보 출발 선박보다 두 배 이상 높았습니다.
영국 왕립 아프리카 회사(Royal African Company)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알 수 있습니다. 1672년부터 1731년 사이에 회사 소유 선박 653회 항해를 통해 187,697명의 노예를 운송했으며, 그중 38,497명이 도중에 사망했습니다. 이전 왕립 모험가 회사도 104회 항해에서 26,925명의 노예를 운송했고, 6,620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예선 승무원들 역시 높은 사망률을 경험했습니다. 토마스 클락슨의 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사망률은 다른 항해의 승무원들보다 상당히 높았으며, 때로는 같은 배의 노예들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기후, 질병 지역, 아프리카의 열악한 조건 등이 노예들의 대우와 사망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도착 후: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분배
대서양 노예 무역은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 해안에 도달한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약 179개의 항구를 확인했으며, 여기에 1,1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인들이 유럽 노예 상인들에 의해 운송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 20개의 항구가 8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인을 받았습니다. 브라질에서는 1,839,000명이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고, 1,550,000명이 살바도르 데 바이아에 도착했습니다. 자메이카의 킹스턴은 886,000명의 아프리카인을 받았고, 바베이도스의 브리지타운은 493,000명을 받았습니다. 생도밍그(현재의 아이티)의 카프-프랑세는 406,000명의 아프리카인들의 하선 지점이었고, 미국의 사우스 캐롤라이나 찰스턴은 186,000명이었습니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아프리카 노예들은 대부분 설탕, 담배, 쌀, 커피, 코코아, 면화 등의 플랜테이션 농작물 생산에 투입되었습니다. 모든 아프리카 노동자의 거의 70%가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 럼주, 당밀 및 기타 부산물을 생산하는 플랜테이션에서 일했습니다. 이 제품들은 유럽, 북미 및 대서양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수출되었습니다[1].
노예 소유자들은 그들의 노예들에게 식량을 배급했습니다. 일부 노예들은 낚시를 하고, 야생 동물을 사냥하고, 소유자들이 할당한 정원에서 작물을 재배했습니다. 일부 가정 노예들은 그들의 소유자와 비슷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대체로 노예들의 식단은 그들 소유자의 문화와 정책에 달려 있었습니다. 노예 소유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 그들의 식품 배급량이 줄어들었습니다. 일부 소유자들은 가뭄이나 작물 실패 시기에 노예들이 음식을 찾아 돌아다니도록 허용했습니다. 소유자에게 시간이 좋고 공급이 풍부할 때, 휴일이나 생산 증가를 위한 인센티브로 노예 노동자들에게 추가 배급이 주어질 수 있었습니다[5].
노예 무역의 종결과 그 유산
대서양 노예 무역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했습니다. 영국은 1807년에 노예 무역을 폐지했으며, 미국도 같은 해에 외국 노예 무역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1808년부터 1867년까지 약 2,208,000명의 노예를 불법 노예 무역을 통해 브라질로 계속 수송했습니다[14].
대서양 노예 무역은 1500년부터 1870년까지 약 1,200만에서 1,50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강제로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이주되었으며, 그 결과 아프리카 디아스포라(African Diaspora)라고 알려진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즉, 아프리카 출신의 수백만 명이 전 세계에 살게 되었습니다.
대서양 노예 무역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인구 구성, 문화, 사회, 경제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인종 관계와 인종 차별의 역사적 뿌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노예 무역의 이익은 유럽, 특히 영국의 많은 항구 도시들의 급속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런던, 리버풀, 브리스톨과 같은 영국 항구 도시들은 노예 무역과의 관련으로 얻은 부로 인해 급속히 확장되었습니다[15].
결론
대서양 노예 무역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강제 이주 중 하나였습니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1,25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무역은 아프리카 내륙에서의 포획부터 대서양 횡단,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판매와 분배까지 복잡한 물류 체계를 통해 운영되었습니다.
노예 무역의 물류는 아프리카 내륙에서 해안까지의 이동, 노예선에서의 중간 항로, 그리고 아메리카에서의 분배와 노동 착취의 세 단계로 구성되었습니다. 각 단계마다 노예들은 극도로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생존해야 했으며, 많은 이들이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서양 노예 무역은 삼각 무역 시스템의 일부로 운영되었으며, 이는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사이의 상품과 사람의 순환을 포함했습니다. 이 시스템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소유자들에게 큰 부를 가져다 주었지만,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노예 무역의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그것은 인종 관계,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세계 여러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렇듯 대서양 노예 무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많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다만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그들의 문화와 고유의 유산도 함께 전해져서 다문화적인 미국의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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