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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얀 피테르스존 쿤의 학살 — 반다 섬의 봄날에 사라진 15,000명 1. 오늘 쿠팡에서 검색해본 육두구의 가격은 300g에 13000원 한다. 우리는 그 향신료가 너무도 저렴하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대가가 치러졌는지 물어볼만한 가치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1621년 봄, 반다 제도의 한 작은 섬에서는 육두구 한 알을 차지하기 위한 대가로 섬 전체의 인구가 사라졌다. 오늘날에도 그 섬에는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네덜란드 식민 양식의 저택, 낡은 요새의 돌담, 그리고 정향과 육두구가 자라는 숲. 그러나 그 숲은 원래 그 땅의 주인이 가꾸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름은 대부분 기록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한 무역 회사의 공급망을 지키기 위해 지워진 사람들이었다. 2. 반다 제도는 오늘날 인도네시아 말루쿠 주에 속한 작은 섬들로, 육두구와 메이스의 유일한 원산지였.. 2026. 10. 29.
4-7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창고 — 세계 최초의 글로벌 재고 관리 1. 당신은 최근 마트에서 아무 생각 없이 계피 한 통을 집어 들었을지 모른다. 진열대에는 언제나 충분한 양의 계피가 있었고, 가격도 안정적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 계피 한 통의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왜 진열대에서 사라지지 않는지, 그 이면에 어떤 재고 관리의 논리가 작동하는지 생각해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현대의 유통 기업들은 정교한 알고리즘으로 수요를 예측하고, 적정 재고를 유지하며, 가격 변동을 통제한다. 이 시스템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17세기 암스테르담의 한 거대한 창고에 도달하게 된다. 그 창고는 향신료로 가득 차 있었고, 그곳에서는 단순한 보관이 아니라 세계 시장을 통제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창고의 주인은 네덜란.. 2026. 10. 27.
4-6화. 몬순의 달력 — 계절풍이 결정한 무역 시즌 1. 당신은 오늘 스마트폰이나 뉴스를 통해 아침 일기 예보를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비가 올지, 바람이 얼마나 불지, 기온이 어떻게 변할지. 이 날씨 정보는 외출 준비를 넘어 물류의 모든 영역을 움직인다. 항공사는 기상 데이터로 이착륙을 조정하고, 해운사는 파고와 풍속을 분석해 운항 일정을 짠다. 농산물 유통업체는 장마와 태풍의 경로를 보며 출하 시기를 결정한다. 우리는 기상 예보를 일상의 편의로 여기지만, 물류의 관점에서 그것은 생존의 기술이다. 5백 년 전 인도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시절의 일기 예보는 위성도, 슈퍼컴퓨터도 아닌,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경험과 하늘을 읽는 눈이었다. 그리고 그 하늘을 지배한 것은 몬순이었다. 2. 몬순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다. 그것은 인도양과 아시.. 2026. 10. 22.
4-5화. 카라카 선의 배수량 — 떠다니는 요새의 경제학 1. 오늘날 세계 해운의 척도는 TEU다. 20피트 컨테이너 하나를 기준으로 한 이 단위는, 한 선박이 얼마나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는지를 말해 준다. 2만 4천 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등장한 지금, 해운사들은 1TEU당 운임을 계산하고, 그 운임에 연료비와 선원비와 항만 사용료를 더해 이윤을 산출한다. 선박의 크기는 곧 물류의 경제학이며, 배수량은 곧 이윤의 단위다. 그러나 이토록 정교한 계산이 처음 등장한 것은 21세기의 일이 아니다. 16세기 초 리스본의 조선소에서도, 상인과 선장들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 배에 향신료를 얼마나 실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향신료는 배를 건조하고 운영하는 비용을 몇 배로 갚아 줄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카라카 선이었다. 2. 15세.. 2026. 10. 20.
4-4화. 바스쿠 다 가마의 화물 목록 — 캘리컷에서 실은 것들 1. 당신이 오늘 해외여행을 떠난다고 가정해 보자. 여행 가방에는 무엇을 넣을 것인가. 아마도 현지에서 쓸 현금, 여행자 수표나 신용카드, 그리고 혹시 모를 선물용 기념품 몇 점일 것이다. 그러나 1497년, 인도로 향하는 바스쿠 다 가마의 배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화물이 실려 있었다. 꿀과 올리브유, 줄무늬가 있는 면직물, 구리로 만든 냄비와 세면대, 그리고 산호 목걸이 몇 상자. 포르투갈 왕실이 인도양 무역을 위해 준비한 최고의 수출품들이었다. 문제는 이 화물들이 인도에서는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는 데 있다. 다 가마의 첫 항해는 이처럼 물류의 냉혹한 비대칭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2. 1497년 7월, 리스본을 떠난 네 척의 배는 아프리카 대륙의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희망.. 2026. 10. 13.
4-3화. 아바스 왕조의 부엌 — 바그다드에서 쓰인 최초의 요리책 1. 당신은 오늘 저녁 무엇을 요리할 것인가.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확인하고, 스마트폰으로 레시피를 검색하고, 필요한 양념을 꺼내 불을 켠다. 요리는 우리에게 일상의 기술이고, 레시피는 언제든 손에 쥘 수 있는 정보일 뿐이다. 그러나 천 년 전 바그다드에서, 요리책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문명의 정수가 담긴 지적 유산이었고, 제국의 물류가 낳은 사치의 기록이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요리 전통의 출발점이었다. 우리가 오늘날 '중동 요리' 혹은 '이슬람 세계의 음식 문화'라 부르는 것의 뿌리는 바로 그때, 바로 그곳에서 쓰인 두꺼운 필사본들 속에 있다. 그리고 그 필사본들의 행간에는 향신료의 글로벌 물류가 숨어 있다. 2. 8세기 중반, 아바스 왕조는 제국의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 2026.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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