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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비잔티움 제국의 해상 물류: 동로마 제국의 물류 중심지 콘스탄티노플

by 이박사의 지식창고 2025. 3. 29.

 

비잔티움 제국은 동서 무역의 중심축으로서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해상 교역의 핵심 허브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탁월한 지리적 위치와 첨단 항만 시설을 바탕으로 천 년 이상 유라시아 대륙의 물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이 도시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자리 잡아 동로마 제국의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위상을 뒷받침하는 핵심 역할을 했으며, 비잔티움의 해상 물류 시스템은 지중해 문명의 발전과 유럽, 아시아 간 교역 네트워크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본 보고서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의 해상 물류와 콘스탄티노플이 물류 중심지로서 어떻게 기능했는지, 그리고 비잔티움의 해상 네트워크가 중세 세계 경제에 미친 영향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겠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지리적 특성과 해상 물류의 중요성

비잔티움 제국은 지중해, 흑해, 에게해를 아우르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러한 지리적 위치는 제국의 해상 물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해 동서 무역의 핵심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지점은 육상 및 해상 무역로가 교차하는 곳으로,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의 상품과 유럽 생산품이 만나는 독보적인 장소였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러한 지리적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체계적이고 정교한 해상 물류 시스템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시스템은 항구 시설, 창고, 세관, 선박 건조 및 수리 시설 등 다양한 인프라를 포함했으며, 이를 통해 제국은 광범위하고 견고한 해상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의 해상 물류는 단순한 상품 운송을 넘어 제국의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영향력, 그리고 문화적 교류의 근간이었습니다.
비잔티움의 해상 물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는 그 놀라운 지속성입니다. 13세기의 격심한 정치적, 군사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의 해상 무역은 끊임없이 유지되었으며, 특히 도자기와 같은 고급 상품의 생산과 수출은 변함없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는 비잔티움의 해상 물류 시스템이 얼마나 탄탄하고 회복력 있게 구축되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비잔티움 해상 무역의 역사적 발전

비잔티움 제국의 해상 무역은 로마 제국의 유산을 면면히 이어받아 점차 독특한 특성을 발전시켰습니다. 로마 시대부터 지중해는 '마레 노스트룸(우리의 바다)'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비잔티움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흑해와 동방으로의 무역 영역을 과감하게 확장해 나갔습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의 건설과 더불어 비잔티움의 해상 무역은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초기에 해상 무역은 국가가 엄격하게 통제하는 영역이었으며, 황제의 특권과 직결된 비단, 자주색 염료와 같은 특정 상품의 거래는 매우 엄격하게 관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적 무역업자들의 역할과 중요성이 점진적으로 커졌고, 9-10세기에 이르러서는 해상 무역의 상당 부분이 민간 상인들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비잔티움의 해상 물류 시스템이 더욱 역동적이고 유연하게 진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전략적 위치와 물류 중심지로서의 역할

콘스탄티노플은 세 개의 수로(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 해협)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점에 자리하고 있어 동서 무역의 관문 역할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천연 항구인 금각만(Golden Horn)을 보유하고 있어 항만 도시로서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13].

콘스탄티노플의 금각만은 깊고 넓으며 폭풍으로부터 보호받는 천연 항구로, 대규모 선단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항구는 여러 부두와 선착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각 특정 상품이나 지역의 무역을 담당했습니다. 예를 들어, 프로스포리온(Prosphorion) 항구는 흑해 지역에서 오는 곡물 선박을 위한 시설이었고, 콘토스칼리온(Kontoskalion) 항구는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오는 선박을 주로 수용했습니다[13].

콘스탄티노플의 항구 시설과 운영

콘스탄티노플의 항구 시설은 단순한 선박 정박 공간을 넘어 복합적인 물류 인프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항구 주변에는 대규모 창고와 보관 시설이 있어 다양한 상품을 보관하고 분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세관과 검문소가 설치되어 상품의 통관과 세금 징수가 이루어졌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항구 운영은 엄격한 규정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선박은 입항 시 검사를 받아야 했으며, 상품의 종류와 양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특히 특정 전략 물자(예: 무기, 귀금속, 비단)의 수출을 엄격히 통제했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무거운 처벌이 가해졌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항구는 또한 조선소와 선박 수리 시설을 갖추고 있어, 비잔티움의 상선과 해군 함대를 건조하고 유지하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시설은 비잔티움 제국의 해상 무역과 해군력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반이었습니다.

이타리아 사제이자 여행가인 크리스토포로 부온델몬티  ( c.1385 – c.1430 ) 가 남긴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플지도 (1422)는 도시의 가장 오래 살아남은지도이며 1453 년 터키의 도시 정복보다 앞선 유일한 지도 는 이탈리아 프란체스코회 사제이자 여행가였으며 서구 세계 전역에  그리스 와 그리스 유물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홍보하는 선구자였습니다.

비잔티움의 해상 무역 네트워크와 주요 교역 루트

비잔티움 제국은 광범위한 해상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지중해, 흑해, 홍해, 심지어 인도양까지 뻗은 교역로를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제국의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영향력 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중해 무역 루트는 비잔티움 제국의 가장 핵심적인 해상 교역로였습니다. 이 루트를 통해 콘스탄티노플은 이탈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레반트 지역과 활발한 무역을 전개했습니다. 특히 이집트와의 무역은 비잔티움에게 매우 핵심적이었으며, 이집트 술탄이 비잔티움 황제에게 보내는 귀중한 선물과 상품들이 이 루트를 따라 운송되었습니다.
지중해 동부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했지만, 서부 지역에서는 베네치아, 제노아, 피사와 같은 이탈리아 해상 도시국가들의 입지가 점차 커졌습니다. 특히 12-13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지중해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흑해 무역루트는 비잔티움 제국의 또 다른 중요한 무역 영역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한 선박들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여 흑해에 진입한 후, 크림 반도, 코카서스, 당시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지역과 무역을 펼쳤습니다.
흑해 지역에서는 카파(Caffa, 현재의 페오도시아)와 같은 도시들이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14세기 말에 이르러 카파는 "흑해 전체의 지배자"로 불릴 정도로 이 지역 해상 무역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이 도시는 크림 반도 해안선 전체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상 통신, 항구 시설, 세마포어 신호 시스템 등을 통해 흑해에서의 안전한 항해를 보장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동방 지역과의 무역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실크로드의 서쪽 종착점인 콘스탄티노플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에서 오는 비단, 향신료, 도자기 등 귀중한 상품을 유럽으로 전달하는 핵심 중개자 역할을 했습니다. 이 무역 루트는 주로 육상 경로였지만, 해상 루트와 연결되어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교역 네트워크를 형성했습니다.

비잔티움의 해상 물류 관리와 법적 체계

비잔티움 제국은 해상 무역과 물류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정교한 제도와 법적 시스템을 개발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제국의 해상 물류 운영을 효율화하고 국가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비잔티움의 해상법은 로마법의 기반 위에 제국의 특수한 필요를 반영하며 발전했습니다. '로도스의 해상법(Lex Rhodia)'은 비잔티움 해상법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으며, 이후 '바실리카(Basilika)' 법전에 통합되면서 더욱 정교해졌습니다.
비잔티움의 해상법은 선박 소유자와 상인의 권리와 의무, 해난 사고 책임, 해상 보험, 계약 이행 등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했습니다. 특히 '해상 대부(Nauticum Foenus)' 제도는 해상 무역을 위한 혁신적인 금융 지원 체계로, 높은 이자율을 인정하는 대신 항해의 성공적 완료를 상환 조건으로 하는 독특한 대출 형태였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해상 무역 관련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정교한 메커니즘을 구축했습니다. 1192년 제노아와 베네치아 선박 간의 해상 분쟁 사례는 이러한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당시 제노아와 피사의 해적들이 이집트 술탄이 비잔티움 황제에게 보내는 귀중한 선물과 상품을 실은 베네치아 선박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9].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비잔티움 황제는 제노아에 배상을 요구했고, 제노아가 이를 이행하지 않자 콘스탄티노플 내 제노아인들에 대한 강력한 제재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서유럽에서 발전한 '보복권(ius represaliarum)' 관행과 유사한 것으로, 이후 중세와 근대 초기 유럽 국제법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인 세관 제도와 통관 절차를 운영했습니다. 모든 수입 상품에는 일반적으로 10% 수준의 관세가 부과되었으며, 전략 물자나 사치품의 경우 더 높은 세율이 적용되었습니다. 세관은 단순한 세금 징수 기관을 넘어 불법 무역을 감시하고 제국의 경제적 이익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다양한 세관 시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각 항구에는 엄격한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통관 절차는 상품의 종류, 원산지, 목적지 등에 따라 세부적으로 달라졌으며, 특히 전략 물자의 경우 더욱 엄격하고 복잡한 절차가 적용되었습니다.

해상 위험과 대응 방안

비잔티움의 해상 무역은 다양한 위험에 직면했으며, 제국은 이러한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발전시켰습니다.

해적 행위는 비잔티움의 해상 무역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 중 하나였습니다. 1192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제노아와 피사의 해적들은 베네치아 선박을 약탈하여 비잔티움 황제에게 가는 귀중한 상품을 탈취했습니다. 이러한 해적 행위는 비잔티움의 해상 무역에 상당한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해적 행위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해군을 유지했습니다. 특히 '드로몬(Dromon)'이라 불리는 전투함은 해적 선박을 추적하고 제압하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또한 제국은 해적 행위를 법적으로 엄격히 처벌했으며, 해적을 체포하고 처벌하기 위한 국제적인 협력도 추진했습니다.

1:10 스케일의 바이레메 드로몬 선체 재건(위),  마인츠   고대 항해 박물관

 

폭풍, 안개, 암초 등 자연적인 위험도 비잔티움의 해상 무역을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비잔티움은 등대, 항로 표지, 항해 지도 등 다양한 항해 안전 시설과 도구를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카파와 같은 도시에서는 세마포어 신호 시스템을 구축하여 흑해에서의 안전한 항해를 보장했습니다.

비잔티움의 항해사들은 별자리와 해안선을 이용한 전통적인 항해 기술뿐만 아니라, 나침반과 같은 새로운 항해 도구도 사용했습니다. 또한 '페리플루스(Periplus)'라고 불리는 항해 안내서는 해안선, 항구, 위험한 지역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안전한 항해를 도왔습니다.

니코메디아의 아리아누스의 Periplus 1533c, Basel

 

비잔티움 해상 무역의 주요 교역품

비잔티움 제국의 해상 무역은 다채로운 상품을 다루었으며, 이는 제국의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풍요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지표였습니다.
비잔티움은 다양한 지역에서 각기 다른 상품을 수입했습니다. 흑해 지역에서는 곡물, 소금, 어류, 모피, 노예 등을 들여왔고,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는 향신료, 약재, 목화, 설탕 등을 조달했습니다. 또한 동방에서는 비단, 도자기, 보석, 향료 같은 고급 상품을 수입했습니다.
특히 아바스왕조의 칼리프가 비잔티움 황제에게 전달한 귀중한 선물과 상품들은 비잔티움과 이슬람 세계 사이의 활발한 무역 관계를 생생하게 증명합니다. 이러한 외교적 선물 교환은 단순한 경제적 교류를 넘어 양측의 정치적, 문화적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바스 칼리프 알 마문(오른쪽)이 비잔틴 황제 테오필로스(왼쪽)에게 사절을 보내고 있다.@Biblioteca Nacional de España


비잔티움의 주요 수출품으로는 포도주, 올리브 오일, 직물(특히 비단과 귀한 자주색 염료로 물든 직물), 보석류, 유리 제품, 금속 공예품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비잔티움의 도자기는 13세기에 이르러서도 크림 반도와 같은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수출되었으며, 이는 비잔티움의 제조업과 무역 네트워크가 정치적 혼란에도 굳건히 유지되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비잔티움의 수공예품, 특히 종교적 예술품(성상, 성배, 십자가 등)은 유럽과 러시아 지역에서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중요한 수출 상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한 비잔티움의 금화('솔리두스' 또는 '노미스마')는 중세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통화로, 국제 무역 무대에서 광범위하게 통용되었습니다.

타 해상 세력과의 관계

비잔티움 제국은 베네치아, 제노아, 피사 같은 이탈리아 해상 도시국가들과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상황에 따라 협력적이기도 하고, 경쟁적이거나 때로는 완전히 적대적이기도 했습니다.
베네치아는 처음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보호를 받는 도시였지만, 점차 독립적이고 강력한 해상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10-11세기 동안 베네치아는 비잔티움과의 활발한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으며, 특히 콘스탄티노플에 자국 상인들을 위한 거주 지역과 상업 시설을 성공적으로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비잔티움과 베네치아의 관계는 12세기에 들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플 점령과 라틴 제국 설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약 57년 동안 분열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은 라틴인들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제노아는 베네치아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비잔티움과도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1192년의 한 사례를 보면, 제노아 출신 해적들이 베네치아 선박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비잔티움 황제는 제노아에 공식적인 배상을 요구했습니다.
1261년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회복한 후, 비잔티움은 전략적으로 제노아와 동맹을 맺어 베네치아에 대항했습니다. 이러한 동맹의 결과로 제노아는 흑해 지역에서 독점적인 무역 특권을 획득했고, 이를 바탕으로 카파와 같은 주요 도시들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해상 무역 주도권의 변화

13세기 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해상 무역은 지속되었으며, 점차 베네치아인과 제노아인이 무역 시장의 주도권을 가져갔습니다. 이들은 동지중해와 흑해 지역의 정치적, 군사적 갈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자신들의 무역 이익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특히 14세기 말에 이르러 제노아의 영향력 아래 있던 카파는 "흑해 전체의 지배자"로 불릴 만큼 성장했으며, 크림 반도 해안선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습니다. 이는 비잔티움의 해상 무역 주도권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게 완전히 넘어갔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와 해상 물류의 변화

13세기는 비잔티움 제국에게 큰 정치적, 군사적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과 라틴 제국 수립, 그리고 1261년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에 의한 수도 회복 등 격변이 이어졌습니다[14].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의 해상 무역은 계속되었지만, 그 양상은 크게 변화했습니다.

13세기의 정치적, 군사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의 시장성 있는 유약 도자기의 생산은 중단되지 않았으며, 크림 반도 지역으로의 수출도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비잔티움의 경제적 활동이 정치적 상황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해상 무역 네트워크의 탄력성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해상 무역의 주도권은 점차 베네치아인과 제노아인에게 넘어갔으며, 이들은 동지중해와 비잔티움의 정치적, 군사적 갈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무역 이익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이로 인해 비잔티움은 자국 영토 내에서도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14-15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부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가 크게 축소되었으며, 이는 해상 무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이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루스 해협을 차례로 통제하게 되면서, 비잔티움의 흑해 지역과의 무역은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비잔티움 제국의 종말을 의미했지만, 이 도시의 중요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해상 무역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다만 무역의 주체와 네트워크의 성격은 크게 변화했습니다.

비잔티움 해상 물류의 역사적 유산과 현대적 의의

비잔티움 제국의 해상 물류 시스템은 중세 세계 경제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비잔티움의 해상법과 무역 규제는 중세 유럽의 해상법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보복권(ius represaliarum)'과 같은 관행은 서유럽에서 처음 발전했지만, 비잔티움에 도입되어 국제 분쟁 해결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중세와 근대 초기 유럽의 국제법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의 국제 무역 규범에도 그 흔적을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비잔티움이 구축한 광범위한 해상 무역 네트워크는 이후 베네치아, 제노아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이는 근대 초기 유럽의 해상 팽창과 세계 무역 시스템 형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흑해 지역의 무역 네트워크는 14세기 말 카파와 같은, 흑해 전체를 아우르는 '해상 도시국가(thalassopoliteia)' 출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물류 허브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들은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해상 교통로를 활용하며, 이는 비잔티움 시대부터 이어져 온 지리적 이점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비잔티움이 발전시킨 항구 시설과 물류 시스템의 원칙 일부는 현대 해상 물류 시스템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결론

비잔티움 제국의 해상 물류와 그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은 중세 세계 경제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중해, 흑해, 에게해를 아우르는 탁월한 전략적 위치와 정교한 물류 시스템을 바탕으로, 비잔티움은 천 년 이상 동서 무역의 핵심 허브로 기능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독보적인 지리적 위치와 뛰어난 항만 시설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관문 역할을 수행했으며, 비잔티움의 정교한 해상 물류 관리 시스템과 법적 체계는 효율적인 무역과 분쟁 해결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해적 활동과 자연재해 같은 다양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혁신적인 대응 방안을 발전시켜 해상 무역의 안전을 보장했습니다.
비잔티움의 해상 무역은 다채로운 상품을 다루었으며, 이는 제국의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습니다. 베네치아, 제노아 같은 이탈리아 해상 도시국가들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비잔티움은 점진적으로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잃어갔지만, 13세기의 정치적, 군사적 혼란 속에서도 해상 무역과 생산 활동은 꾸준히 지속되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해상 물류 시스템은 중세 세계 경제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남아있습니다. 해상법과 국제 무역 규범에 미친 영향, 해상 무역 네트워크의 유산, 그리고 물류 중심지로서의 전통은 비잔티움의 중요한 역사적 족적입니다. 비잔티움의 해상 물류에 대한 연구는 중세 세계 경제의 역동성과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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