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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 아랍, 인도, 동아프리카 간의 물류 시스템

by 이박사의 지식창고 2025. 4. 12.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 아랍, 인도, 동아프리카 간의 물류

인도양은 수세기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을 연결하는 거대한 무역 네트워크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9-10세기부터 본격화된 이 무역 네트워크는 아랍, 인도, 이란 상인들이 주도했으며, 스리비자야(현 인도네시아 팔렘방)와 잔지바르 같은 주요 중계 무역항을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인도양 무역 체계는 단순한 상품 교환을 넘어 복잡한 물류 시스템, 문화적 교류, 종교의 전파, 다문화 공동체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계절풍을 활용한 항해 기술의 발달은 다양한 지역 간 무역을 가능하게 했으며, 향신료, 직물, 도자기, 금속 제품 등 다양한 상품이 교역되었습니다. 특히 인도 상인들은 금융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아랍 상인들의 상업 활동에 자금을 제공했고, 아랍 상인들은 항해 기술과 지리적 지식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무역 네트워크는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배 이전 인도양 지역의 독자적인 경제 시스템을 형성했으며, 오늘날 이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과 상호 연결성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인도양 무역항로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의 역사적 발전

인도양을 중심으로 한 무역 네트워크는 여러 세기에 걸쳐 발전해왔으며, 문명 간의 상호작용과 교류의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이 네트워크는 단순한 상품 교환을 넘어 기술, 종교, 문화적 관행의 전파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인도양 무역은 고대부터 시작되었지만, 특히 중세 시대에 크게 번영했으며, 9-10세기는 특히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인도양 무역

인도양을 통한 무역은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문명 사이의 초기 무역 교류가 있었고, 이집트와 동아프리카 해안과의 무역 관계도 고대 기록에서 발견됩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인도양을 통해 로마와 인도, 심지어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했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헌인 '에리트라 해의 항해기'(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는 1세기경 홍해에서 인도 서해안에 이르는 무역로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무역은 주로 사치품에 집중되었으며, 향신료, 보석, 비단, 상아 등이 주요 교역품이었습니다.

로마 제국 쇠퇴 이후에도 인도양 무역은 사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에 의해 지속되었습니다. 7세기 이슬람의 등장과 함께 아랍 상인들이 인도양 무역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슬람 제국의 확장은 홍해와 페르시아 만에서 인도 서해안, 동아프리카, 동남아시아까지 이어지는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의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서기 60년의 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 를 나타낸 지도

9-10세기: 인도양 무역의 첫 번째 전성기

9-10세기는 인도양 무역이 특히 번성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중국 해상 무역의 첫 번째 전성기로, 중국 해안을 따라 많은 항구들이 발달했으며, 중국 남북부의 다양한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거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항구들은 최종 소비자에게 직접 상품을 판매하지 않았고, 인도양에는 중국과 아라비아 지역 사이의 중계 무역항이 존재했습니다.

10세기 중국과 아랍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부터 인도양 주변에는 세 개의 무역 권역이 형성되었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 동남아시아와 아라비아 및 페르시아 만 사이, 그리고 아라비아 지역과 동아프리카 사이입니다. 스리비자야(Sri Vijaya)와 바스라(Basra)가 두 주요 중계 무역항이었으며, 중국과 스리비자야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무역 패턴은 벨리퉁(Belitung)과 체리본(Ceribon)의 난파선에서 발견된 화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난파선들의 화물은 인도양 주변의 다양한 제품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9-10세기 인도양 해상 무역이 팔렘방(Palembang)의 스리비자야를 중심으로 동서 무역이 주로 이루어졌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 시기 무역 네트워크는 중국의 도자기, 비단, 인도의 면직물, 향신료, 아라비아의 향료 등 다양한 상품의 교환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벨링퉁섬의 위치와 적십자 표시 (2°45'00"S, 107°35'36"E) 로 표시된 Belitung 난파선을 보여주는 지도 및 유물(중국 당나라시대 유물)

 

중세 이후 무역 네트워크의 변화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인도양 무역은 몽골 제국의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시기에 한 차례 더 번영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육상과 해상 무역로가 통합되어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상업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베니스와 제노바 같은 도시 국가들이 중동 지역과의 무역을 통해 번영했으며, 마르코 폴로와 같은 유럽 여행자들이 아시아로의 여행을 통해 동서 교류에 기여했습니다.

14세기 후반부터는 오만의 호르무즈가 페르시아 만의 주요 무역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호르무즈는 페르시아 만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전략적 위치에 있었으며, 인도, 아라비아, 동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사이의 중계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5세기 초, 중국의 정화(鄭和)의 원정은 인도양 무역 시스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화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동아프리카까지 항해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중국의 해금(海禁) 정책으로 공식적인 중국의 참여는 축소되었습니다.

중국 해군이자 탐험가인 정화 :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 세마랑의 Tay Kak Sie 사원에 있는 동상/ 정화의 함대가 그려진  2005년 중국 우표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과 같은 유럽의 강대국들이 인도양 무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개척한 인도 항로의 발견은 유럽과 아시아 간 직접적인 해상 무역의 길을 열었고, 이는 기존의 전통적인 무역 질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유럽 강대국들은 점차 인도양 무역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며, 기존 무역 네트워크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구성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인도양 연안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구조에 근본적이고 심대한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주요 무역 참여자와 그들의 역할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는 다양한 지역과 문화권의 상인들이 만들어낸 역동적인 교류의 장이었습니다. 아랍, 인도, 이란, 중국 상인들은 각자의 독특한 전문성과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인도양 무역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단순한 상품 거래를 넘어 문화적 소통과 지식의 교환을 촉진했습니다.
아랍 상인들은 7세기 이슬람의 등장 이후 인도양 무역의 주역으로 부상했습니다. 이들은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출발점으로 동아프리카, 인도, 심지어 중국에 이르는 광활한 무역로를 개척했습니다. 향신료, 비단, 도자기, 보석, 향료 같은 고가 상품의 거래에 특화된 그들은 인도양 무역의 핵심 중개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아랍 상인들의 항해 기술과 지리적 지식은 실로 놀라웠습니다. 별자리 관측, 나침반 사용, 계절풍 패턴에 대한 그들의 깊은 이해는 인도양 항해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전문성은 후에 유럽의 대항해 시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아랍 지리학자들이 남긴 항해 매뉴얼과 해도는 인도양 무역로에 대한 귀중한 정보원이 되었습니다.
9-10세기 동남아시아의 난파선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중국 남부의 해상 무역에서 아랍 상인들의 입지가 점차 확대되고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이 시기 그들은 중국, 인도, 동아프리카 간 무역의 핵심 연결고리 역할을 했으며, 이슬람 세계의 확장과 함께 그들의 무역 네트워크도 급속도로 성장했습니다.

동남아시아 난파선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심해의 유문들사진@차이나데일리


더불어 아랍 상인들은 이슬람 문화와 종교 전파의 중요한 매개체였습니다. 그들의 무역 활동은 동아프리카 해안, 인도 서부, 동남아시아에 이슬람교를 전파하며 이 지역의 종교적, 문화적 지형을 변화시켰습니다.

 

인도 상인들의 무역 네트워크

인도 상인들은 인도양 무역에서 오랜 역사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습니다. 그들은 인도 서부 해안의 구자라트, 말라바르, 코로만델 해안의 주요 항구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형성했습니다. 면직물, 향신료, 보석, 약재 등을 주요 수출품으로 하여 아라비아, 동아프리카,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동아프리카, 그중에서도 잔지바르에서의 인도 상인들의 활동은 주목할 만합니다. 1804년부터 1856년 사이 오만 술탄국의 일부였던 시기에 잔지바르의 인도 공동체는 크게 번영했습니다. 사이드 빈 술탄(Sayyid Sa'id bin Sultan al-Busa'idi) 은 인도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환경을 제공했으며, 모든 종류의 세금을 면제해주고 비무슬림 인도인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인도 상인들은 주로 금융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아랍인들이 이 분야에서 충분한 전문성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술탄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습니다. 부사이디(Busa'idi) 왕조는 세관 관리를 힌두교도들에게 맡겼고, 인도 상인들은 잔지바르에서 유럽과 현지 상인들 사이의 해안 무역에서 중개자 역할을 담당했으며, 일부는 노예 무역에도 관여했습니다.
인도 상인들은 잔지바르의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며 아랍의 상업 프로젝트에 자본을 공급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상업 기업에 자본을 투자했고, 특히 아랍인 소유 부동산에 대한 모기지 사업에 집중했습니다. 아랍인들은 자본 부족으로 인해 많은 부동산을 담보로 인도 대금업자로부터 대출을 받았습니다. 인도 상인들이 높은 이자율을 부과하면서 아랍인들은 점점 더 깊은 부채의 늪에 빠졌고, 그 결과 그들의 재산은 점진적으로 인도 상인들에게 이전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도 상인들은 해안 지역 대부분의 상업 프로젝트를 장악했고, 아랍 경쟁자들을 능가하며 많은 이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사이드 빈 술탄(1791–1856) 오만과 진자바르의 술탄 오만의 사자로도 불리웠으면 오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중 한명으로 꼽힙니다./진자바르 위치

 

이란 상인들의 역할

인도양 분지의 해상 무역에서 이란 상인들의 역할은 종종 과소평가되고 있습니다[11]. 학술 역사에서부터 대중 문화에 이르기까지 "무슬림 선원"은 일반적으로 아랍인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인도양 무역의 주요 행위자들은 주로 페르시아인이었습니다[11]. 이는 고고학적 데이터, 현지 기록, 그리고 지명과 개인 이름을 통해 확인됩니다[11].

이란 상인들은 페르시아 만에서 인도 서해안, 그리고 동아프리카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11]. 그들은 특히 향신료, 직물, 보석 등의 고가 상품 무역에 특화되어 있었으며, 복잡한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역의 상품을 인도양 무역권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란 상인들은 또한 문화 교류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은 인도 무굴 제국, 동아프리카 스와힐리 해안, 심지어 동남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어는 인도 무굴 제국의 궁정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 문학과 예술은 인도양 연안 지역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란 상인들은 또한 항해 기술과 지리적 지식의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페르시아의 항해사들은 인도양의 바람과 해류 패턴, 항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지식은 항해 매뉴얼과 해도를 통해 전승되었습니다.

중국과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의 연결

중국은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에 해상 무역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9-10세기는 중국 해상 무역의 첫 번째 전성기로, 중국의 많은 항구들이 이 무역에 참여했으며, 중국 남북부의 다양한 지역에서 온 상품들을 거래했습니다[10].

중국과 스리비자야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중국과 아랍의 상품 기록에는 모두 동남아시아 제품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10]. 이는 동남아시아, 특히 스리비자야가 중국과 아랍 세계 사이의 중요한 중계 무역 지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중국은 도자기, 비단, 차, 금속 제품 등을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에 공급했으며, 이들 상품은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 동아프리카까지 널리 거래되었습니다. 특히 중국 도자기는 인도양 전역에서 가장 가치 있는 교역품 중 하나였으며, 9-10세기 난파선에서 발견된 중국 도자기는 그 품질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15세기 초, 중국의 정화(鄭和)의 원정은 인도양 무역 시스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화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동아프리카까지 항해했으며, 이는 중국의 해상력과 인도양 무역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그러나 이후 중국의 해금(海禁) 정책으로 공식적인 중국의 참여는 축소되었지만, 민간 차원의 무역은 계속되었습니다.

중국의 인도양 무역 참여는 단순한 상업적 교환을 넘어 기술과 문화의 교류에도 기여했습니다. 중국의 도자기 제작 기술, 종이 제조법, 인쇄술 등은 무역로를 따라 서쪽으로 전파되었으며, 반대로 인도양 지역의 다양한 문화적, 기술적 영향도 중국에 전해졌습니다.

주요 무역 중심지와 항로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는 여러 중요한 항구 도시와 무역 중심지를 연결하는 복잡한 항로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심지들은 단순한 상품 교환의 장소를 넘어 문화적 교류와 지식 전파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인도양의 주요 무역 중심지로는 스리비자야, 잔지바르,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만의 항구 도시들, 그리고 인도 서부 해안의 무역 거점들이 있었습니다.

스리비자야: 인도양 무역의 중요 중계지

스리비자야는 인도양 무역에서 핵심적인 중개 무역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재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 지역에 위치했던 스리비자야는 7세기부터 13세기까지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무역을 장악했습니다. 이 왕국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 덕분에 인도양과 남중국해 사이의 무역을 중재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중국, 인도, 중동 간의 향신료 무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0세기 중국과 아랍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인도양 주변에는 세 가지 주요 무역 회랑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 동남아시아와 아라비아 및 페르시아 만 사이, 그리고 아라비아 지역과 동아프리카 사이입니다. 스리비자야와 바스라는 이 무역로의 두 주요 중개 무역항이었으며, 중국과 스리비자야는 매우 긴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벨리퉁과 체리본의 난파선에서 발견된 화물은 인도양 주변의 다채로운 상품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9-10세기 인도양 해상 무역이 팔렘방의 스리비자야를 중심으로 동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스리비자야는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인도의 면직물, 향신료, 아라비아의 향료 등 다양한 상품이 교환되는 국제적 무역의 허브였습니다.
스리비자야의 번영은 해상 무역에 대한 철저한 통제뿐만 아니라 효율적이고 정교한 행정 시스템, 강력하고 압도적인 해군력, 그리고 주변 국가들과의 전략적인 외교 관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왕국은 또한 불교의 중요한 학문적, 문화적 중심지로서 중국, 인도, 아랍 세계에서 온 학자들과 순례자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좌)스리바자야 11세기경 최대 영향력을 나타낸 지도@wikipidia / (우) 1917년 팔렘방 (Palembang) 근처의  무시강 (Musi River) 둑에있는  떠다니는 집 들

잔지바르: 동아프리카 무역의 중심

잔지바르는 동아프리카 해안의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특히 19세기 오만 술탄국의 사이드 빈 술탄이 통치했던 1806년부터 1856년 사이에 가장 번영했습니다. 이 섬은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에서 아프리카 대륙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핵심 거점으로, 아랍, 인도, 유럽 상인들이 활발하게 교역하는 장소였습니다.
인도 상인들은 잔지바르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 집단으로 인정받았으며, 사이드 빈 술탄으로부터 각별한 존경과 후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지역 무역 허가를 받아 현지 상인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며 자신들의 상업 제국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인도 상인들은 이 시기에 이주해 왔으며, 특히 1835년에는 계절풍을 타고 대규모로 도착했습니다.

 

인도 상인들은 무슬림과 힌두교도로 나뉘었지만, 그들은 잔지바르를 고향으로 여기지 않고 인도를 오가며 생활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무슬림 바하라(Bahara)가 두드러졌는데, 대부분이 부유한 상인들이었으며, 잔지바르에 살면서 이곳을 고향으로 삼았습니다.

카치(Kachchh) 상인들도 동아프리카에서 활동했습니다. 인도 북서부 지역인 카치는 인도양의 해상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수세기 동안의 심해 항해와 무역 경험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상업적 시대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18세기에 만드비(Mandvi)의 새로운 상인들의 부상은 오만의 제국 확장이 동아프리카로 확대되는 시기와 일치했으며, 두 그룹 모두 이 기회를 활용했습니다.

잔지바르는 향신료, 특히 정향의 주요 생산지였으며, 코코넛, 상아, 노예 등의 무역도 이루어졌습니다. 이 섬은 동아프리카 해안과 내륙, 아라비아 반도, 인도, 그리고 더 먼 지역을 연결하는 복잡한 무역 네트워크의 중심이었습니다.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만의 항구 도시들

바스라(현 이라크)는 페르시아 만 북쪽에 위치한 핵심 무역항으로, 8세기부터 아바스 왕조의 주요 해상 관문으로 기능했습니다. 이 도시는 육상 실크로드와 인도양 해상로의 교차점에 자리잡아 중국의 비단, 인도의 향신료, 아프리카의 상아가 유럽으로 전달되는 중계지 역할을 했습니다. 10세기 지리학자 이븐 하우칼은 바스라를 "동서 무역의 심장"으로 묘사하며, 이곳에서 페르시아 만을 거쳐 인도 서해안까지 30일간의 항해가 이루어졌다고 기록했습니다.

호르무즈는 14세기부터 페르시아 만 입구의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했습니다. 포르투갈 여행가 토메 피레스는 1515년 이 도시를 "세계의 창구"라 칭하며, 매일 300척 이상의 선박이 정박한다고 기술했습니다. 호르무즈의 번영은 주변 지역의 진주 채취 산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만의 진주는 인도와 중국 귀족들에게 고가의 사치품으로 거래되었으며, 이 교역은 19세기 일본의 인조진주 기술 도입 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계절풍을 활용한 항해 시스템

인도양 무역의 핵심 동력은 계절풍(아랍어: 마우심)을 이용한 항해 기술이었습니다. 1세기 그리스 항해사 히팔로스가 체계화한 이 시스템은 6월부터 9월까지 남서풍을 타고 아라비아에서 인도로, 11월부터 3월까지 북동풍을 이용해 귀항하는 패턴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아덴과 캘리컷 항구에서는 선박의 출발을 알리는 등대가 점등되었으며, 항해사들은 별자리 관측법(아랍어: 카마르)과 해류 지도를 활용해 정확한 항로를 확보했습니다.

중국 기록 (瀛涯勝覽)에는 정화 원정대가 자오지(磁器, 도자기) 50만 점을 실은 선단이 계절풍을 활용해 20일 만에 칼리컷에 도착한 사례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항해 기술은 12세기 아랍 학자 알-이드리시의 에 수학적 계산과 함께 체계화되어 전승되었으며, 후일 유럽 항해자들의 항해 매뉴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론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는 단순한 상품 교환을 넘어 문명 간 대화의 장이었습니다. 7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어진 이 시스템은 오늘날 글로벌 경제의 원형을 보여주며, 다문화 협력의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현대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은 역사적 해상 실크로드의 유산을 계승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으나, 과거의 평등적 교류 모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향후 연구는 유럽 중심적 세계사 관점을 탈피해 인도양 주변 국가들의 자생적 발전 양상을 심층적으로 조명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문헌
Pearson, M. N. (2018). 인도양: 대양의 역사와 대양에서의 역사 (노영순 역). 선인. (원저 2003년 출판)
이민자. (2009). 개항기 이전 동아시아의 교류-무역 네트워크. 동아시아문화연구, 45(2), 112-134.
김영수. (2022). 중국 일대일로 전략의 정치적 의도와 실제 분석. 국제정치논총, 62(3), 7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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