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는 해상 무역을 통한 글로벌 패권 경쟁이 본격화된 시기로,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의 치열한 경쟁이 두드러졌습니다. 두 국가는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이르는 광범위한 무역망을 구축하며 해상 물류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무역 패턴이 변화하고, 새로운 상업 기술과 금융 시스템이 발전했으며, 결국 현대 자본주의와 글로벌 무역 체계의 기초가 형성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17세기 전반기에 혁신적인 선박 건조 기술과 효율적인 무역 시스템으로 우위를 점했으나, 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영국이 해군력 강화와 적극적인 식민지 정책을 통해 점차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경쟁은 단순한 상업적 갈등을 넘어 일련의 영-네 해상전쟁으로 이어졌고, 궁극적으로 근대 세계 질서와 글로벌 물류 체계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17세기 해상 무역의 변화와 경쟁 구도
전통적 해상 강국의 쇠퇴와 새로운 경쟁자의 부상
16세기까지 해상 무역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주도했지만, 17세기에 이르러 이들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은 아시아 지역의 핵심 무역 거점인 호르무즈를 1622년에, 무스카트를 1650년에 상실하면서 해당 지역에서의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영향력이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이러한 기존 강대국의 쇠퇴는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신흥 해상 국가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네덜란드는 17세기 초반부터 혁신적인 선박 건조 기술과 효율적인 무역 시스템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 무역 기업으로 발전하여 주식 시장과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영국 또한 1600년 영국 동인도 회사(EIC)를 설립하고 아시아 무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인도 회사의 설립과 무역 구조의 변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설립은 단순한 상업 조직의 탄생을 넘어, 전혀 새로운 글로벌 무역 체계의 출발점을 의미했습니다. 이 회사들은 본국으로부터 특정 지역에서의 독점 무역권은 물론 군대 유지, 요새 건설, 조약 체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이는 무역과 정치적 영향력이 독특하게 융합된 혁신적인 '회사-국가(company-state)' 모델이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 VOC는 동남아시아에서 매우 공격적이고 전략적인 무역 접근법을 채택했습니다. 코넬리스 마텔리프 드 용의 1605-1608년 동아시아 원정과 그의 혁신적인 전략적 제안들은 VOC의 초기 방향 설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말라카 장악 시도는 비록 실패했지만, VOC는 이후 자바,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점차 강력한 입지를 구축해나갔습니다.
이러한 무역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는 소위 "Country Trade" 또는 아시아 항구 무역이라 불리는 혁신적인 무역 형태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는 유럽과 아시아를 직접 연결하는 장거리 무역뿐만 아니라, 아시아 내 지역 간 무역을 유럽 회사들이 주도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획기적인 변화는 글로벌 및 아시아 무역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재편했습니다.
원자재 확보와 시장 장악을 위한 경쟁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상 경쟁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핵심 목표를 중심으로 펼쳐졌습니다. 첫째, 향신료와 실크 같은 동방의 고급 상품을 확보해 유럽 시장에 공급하는 것이었고, 둘째, 자국에서 생산된 상품, 특히 영국의 경우 국내 수요를 초과한 양모와 같은 제품의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경쟁은 아시아 지역의 주요 무역 거점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각축전으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생산지, 인도의 직물 생산지, 페르시아(이란)의 실크 생산지는 가장 중요한 쟁탈 지역이었습니다. 두 나라는 이들 지역에서 현지 통치자들과의 조약 체결, 독점 무역권 확보, 때로는 군사력을 동원한 직접적인 점령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며 경쟁을 벌였습니다.
네덜란드의 해상 무역 전략과 성공 요인
혁신적인 선박 건조 기술
네덜란드의 17세기 해상 무역 성공에는 혁신적인 선박 건조 기술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1628년에 건조된 바타비아(Batavia) 호는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뛰어난 조선 능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시기 북유럽과 서유럽의 선박 건조에는 참나무(오크)가 주된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는데, 해상 강국들은 급증하는 상선과 군함 건조에 필요한 충분한 목재를 확보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여 발트 지역, 뤼베크 배후지, 니더작센 등 다양한 지역에서 목재를 조달하는 전략적 다변화 접근법을 채택했습니다. 이러한 혁신적인 접근은 네덜란드가 17세기 초 목재 부족 문제를 현명하게 극복하고 거대한 상선단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더불어 네덜란드는 'fluyt'라는 형태의 상선을 개발했습니다. 이 선박은 최소한의 선원으로 운항이 가능하고, 큰 화물 적재 능력을 지녀 무역의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이는 네덜란드가 경쟁국들보다 더욱 낮은 운송 비용으로 무역을 수행할 수 있게 한 기술적 우위였습니다.
또한 항해 기술과 해도(海圖) 제작 기술도 크게 발전했습니다. 네덜란드는 특히 정확한 해도 제작으로 유명했으며, 이는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항해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또한 천문 항법이 발전하면서 선박의 위치 파악 정확도가 높아졌고, 이는 장거리 해상 무역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효율적인 무역 네트워크와 조직 시스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업 구조와 운영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VOC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 무역 기업으로 발전하면서 주식 발행을 통한 대규모 자본 조달, 분권화된 경영 구조, 효율적인 물류 시스템 등을 구축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현대 자본주의와 기업 경영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VOC는 동남아시아에 바타비아(현 자카르타)를 중심 기지로 삼고, 인도네시아 제도, 말레이 반도, 실론(현 스리랑카), 인도, 일본, 중국 등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했습니다. 이 네트워크는 단순히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 내 지역 간 무역(인트라-아시아 무역)도 적극적으로 수행했습니다.
현지 사회 구조의 변화와 무역 장악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에서 무역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현지 정치 구조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VOC는 서면 조약, 해상 통행증, 고정 가격, 독점 무역 거래 등의 법적 수단과 정책을 활용하여 현지 사회의 기존 계층 구조를 우회하고 전통적인 정치경제적 제도를 변형시켰습니다.
이러한 개입으로 인해 현지 통치자들의 수입과 전통적 의무 수행 능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결과적으로 현지 사회의 불안정을 초래했습니다. 반면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자국의 무역 이익을 극대화하고 경쟁자들을 배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특히 말레이 제도에서 VOC는 조약 파트너와 동맹국의 정치 구조를 의도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드는 정책을 과감하게 실행했습니다. 이러한 전략은 현지 사회의 통치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궁극적으로 네덜란드가 해당 지역의 무역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영국의 해상 전략과 대응
동인도 회사의 확장과 아시아 무역 전략
영국 동인도 회사(EIC)는 네덜란드 VOC보다 2년 앞서 1600년에 설립되었지만, 초기에는 VOC만큼 적극적인 영토 확장 전략을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영국은 무굴 제국이 지배하던 인도 본토에서 무역 특권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1612년 수라트에 첫 무역소를 설립한 후, 영국은 점진적으로 인도 전역으로 무역망을 넓혀갔습니다.
영국은 페르시아 무역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7세기 페르시아(현 이란) 지역은 실크 생산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영국과 네덜란드는 이 지역의 무역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습니다. 포르투갈이 1622년 호르무즈와 1650년 무스카트에서 축출된 후 발생한 권력 공백을 두 나라가 메우려 했던 것입니다.
인도와 페르시아에서의 무역은 영국에게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첫째, 실크, 면직물, 향신료 등 동방의 고급 상품을 확보하여 유럽 시장에 공급하는 것이었고, 둘째, 영국 국내에서 과잉 생산된 양모 제품 등을 판매할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서양 무역과 설탕 시장에서의 경쟁
17세기 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쟁은 아시아에 국한되지 않고 대서양 무역에서도 매우 치열하게 펼쳐졌습니다. 특히 브라질과 카리브해 지역의 설탕 무역은 양국 간 경쟁의 핵심 무대였습니다.
17세기 전반기에 브라질은 서반구의 주요 설탕 생산지로, 유럽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습니다. 마그레브 해적의 위협과 네덜란드-이베리아 간 제국 경쟁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설탕 무역은 매우 수익성이 높았습니다. 네덜란드는 1630년부터 1654년까지 브라질 북동부를 직접 점령하고 설탕 플랜테이션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카리브해 지역의 설탕 생산 증가로 유럽 시장 가격이 하락했고, 브라질 내 설탕의 명목 가격은 정체되었습니다. 더욱이 규제된 해운 시스템으로 인해 가격 차이는 줄어들고 거래 비용은 증가했습니다. 여기에 프랑스와 영국의 중상주의 정책으로 자국 시장이 브라질 설탕에 사실상 닫히면서 무역 환경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무역업자들은 다양한 해상 운송 전략과 위험 관리 방법, 지불 및 신용 관행을 혁신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무역 경로를 따라 공급과 수요를 최대한 활용하고, 유휴 화물 공간을 활용해 운송 비용을 줄이는 해운 조직이 발달했습니다. 상인들은 더 비싼 상품을 저렴한 제품과 혼합 운송함으로써 많은 선박이 항구 간을 오가게 하고, 정보 흐름을 증가시키며, 차익거래로 이익을 얻고 위험을 분산시키는 치밀한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해군력 증강과 군사적 대응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해군력 강화에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크롬웰 시대와 왕정복고 이후 찰스 2세 재위 기간 동안 영국 해군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해군력 증강은 상업적 이익 보호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치열한 무역 경쟁은 결국 일련의 영-네덜란드 해상전쟁(1652-1674)으로 격화되었습니다. 1652-1654년의 제1차 영-네 해상전쟁, 1665-1667년의 제2차 영-네 해상전쟁, 그리고 1672-1674년의 제3차 영-네 해상전쟁은 모두 무역 이익과 해상 패권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러한 군사적 갈등은 영국의 항해조례(Navigation Acts)와 같은 배타적 무역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1651년 제정된 항해조례는 영국 식민지 무역을 영국 선박으로만 제한함으로써 네덜란드의 중개 무역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이는 제1차 영-네 해상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주요 무역 지역에서의 영-네 경쟁 양상
동남아시아에서의 경쟁과 갈등
동남아시아, 특히 인도네시아 제도와 말레이 반도는 향신료 무역을 둘러싼 영국과 네덜란드의 가장 치열한 경쟁 무대였습니다. 네덜란드는 1619년 바타비아(현 자카르타)를 건설하고 이를 동아시아 무역의 핵심 거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VOC는 바타비아를 교두보로 삼아 몰루카 제도(향신료 제도), 자바, 수마트라 등지로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습니다.
네덜란드는 말레이 제도에서 현지 통치자들과의 조약, 해상 통행증, 고정 가격, 독점 무역 계약 등 다양한 법적 수단과 정책을 활용하여 기존 정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현지 사회의 계층 구조를 우회하고 전통적인 정치경제적 제도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통치자들의 수입과 전통적 의무 수행 능력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반면 영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초기에 네덜란드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1623년 암보이나 학살 사건 이후 영국은 점진적으로 인도네시아 제도에서 후퇴하고 인도 무역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말레이 반도의 페낭과 싱가포르 등지에서 점차 입지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수마트라 서해안의 인데라푸라 왕국은 이러한 유럽 열강의 경쟁 속에서 독창적인 무역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17-18세기 동안 이 왕국은 정박하는 상선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파격적인 정책을 통해 수마트라 서해안의 주요 상업 중심지로 급부상했습니다. 특히 이 왕국은 섬 내 무역, 항구 간 무역, 섬 간 무역 등 세 가지 유형의 지역 무역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인도와 페르시아(이란)에서의 무역 경쟁
인도 지역에서는 영국이 네덜란드보다 우위를 차지했습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무굴 제국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수라트, 마드라스, 봄베이, 캘커타 등지에 무역소를 설립하고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특히 면직물 무역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주요 수입원이었으며, 유럽 시장과 아시아 내 지역 간 교역에서 핵심적인 상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페르시아(이란) 지역에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쟁은 더욱 치열했습니다. 17세기 초 포르투갈이 이 지역에서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가는 상황에서, 두 나라는 페르시아 실크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1622년 호르무즈와 1650년 무스카트에서 포르투갈이 축출된 후 발생한 권력 공백은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경쟁을 더욱 격화시켰습니다.
이 지역의 무역은 단순히 실크 구매와 유럽 제품 판매에 국한되지 않고, 더욱 복잡한 지역 간 무역 네트워크의 일부였습니다. "Country Trade" 또는 아시아 항구 무역으로 알려진 이 시스템은 글로벌 및 아시아 무역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브라질과 카리브해의 설탕 무역
17세기 전반기 브라질은 서반구에서 가장 중요한 설탕 생산지로, 유럽 시장에서 매우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습니다. 이 시기 네덜란드는 브라질 북동부를 1630년부터 1654년까지 일시적으로 점령하며 설탕 생산과 무역에 직접 개입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강력한 반격으로 결국 네덜란드는 브라질에서 철수해야 했습니다.
한편 영국은 카리브해 지역, 특히 바베이도스와 자메이카에서 설탕 플랜테이션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카리브해 지역의 설탕 생산 급증으로 유럽 시장 가격이 하락했고, 이는 브라질 설탕 무역의 수익성을 크게 감소시켰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무역업자들은 더욱 정교한 전략을 개발했습니다. 그들은 무역 경로를 따라 공급과 수요를 최대한 활용하고, 유휴 화물 공간을 이용해 운송 비용을 줄이는 혁신적인 해운 조직 방식을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고가 상품을 저렴한 제품과 혼합 적재함으로써 더 많은 선박이 항구 간을 오가게 하고, 정보 흐름을 증가시키며, 차익거래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고 위험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영국의 경우 설탕이 당시 비교적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네덜란드가 전통적으로 거래하던 저가 제품들보다 보험료를 감당할 재정적 여유가 더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탕의 가치는 아시아 향신료나 스페인 아메리카의 귀금속만큼 높지 않았기에, 무역업자들은 비용과 이익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신중하게 유지해야 했습니다.
17세기 해상 무역의 혁신과 발전
무역 금융과 보험 시스템의 발전
17세기 해상 무역이 규모와 복잡성을 더해가면서 이를 뒷받침할 금융 시스템도 함께 성장했습니다. 특히 암스테르담은 당시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떠올랐으며, 암스테르담 거래소와 은행은 국제 무역을 위한 핵심적인 금융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는 주식 발행을 통한 대규모 자본 조달 방식을 도입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업 금융 모델을 선보였습니다. 이는 현대 주식회사와 자본 시장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해상 보험 또한 이 시기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장거리 해상 무역에는 해적, 악천후, 선박 사고 등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이러한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한 보험 시스템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설탕과 같은 중간 가치의 상품은 아시아 향신료나 귀금속보다는 낮지만 전통적인 네덜란드 무역품보다는 높은 가치를 지녀, 보험료를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무역업자들은 다양한 위험 관리 방법과 지불 및 신용 관행을 정교하게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여러 선박을 다양한 항구 사이에서 운항시켜 정보의 흐름을 증대시키고, 차익거래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며, 위험을 분산시키는 전략이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영-네 해상 경쟁의 결과와 영향
영-네 해상전쟁과 세력 균형의 변화
17세기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의 해상 경쟁은 결국 일련의 치열한 해상전쟁으로 격화되었습니다. 1652-1654년의 제1차 영-네 해상전쟁, 1665-1667년의 제2차 해상전쟁, 그리고 1672-1674년의 제3차 해상전쟁은 모두 무역 이익과 해상 패권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러한 군사적 충돌을 통해 해상 세력의 균형은 점진적으로 변화했습니다. 초기에는 네덜란드가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했지만, 17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 확충과 적극적인 식민지 정책을 통해 점차 우세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688년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의 윌리엄 공이 영국 왕 윌리엄 3세로 즉위한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적대적 경쟁에서 협력적 경쟁으로 서서히 전환되었습니다.
무역 구조와 식민지 체계의 재편
17세기 영-네 해상 경쟁은 글로벌 무역 구조와 식민지 체계의 재편을 가져왔습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제도, 대만, 실론 등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식민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반면 영국은 인도 본토와 북미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 17세기 후반부터 북미 식민지에서의 성공적인 정착과 인도에서의 영향력 확대는 이후 18-19세기 대영제국 형성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에서의 무역 독점을 유지했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영국에 해상 패권을 내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무역 상품과 경로의 재편도 가져왔습니다. 17세기 초반 향신료와 실크가 가장 중요한 아시아 교역품이었다면, 17세기 후반부터는 차, 면직물, 도자기 등으로 교역품이 다양화되었습니다. 또한 대서양 무역에서는 설탕, 담배, 면화 등 플랜테이션 작물의 중요성이 더욱 증가했습니다.
글로벌 물류 체계와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
17세기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상 경쟁은 근대 글로벌 물류 체계와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 무역 기업으로 발전하여 주식 시장과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했습니다7. 암스테르담은 국제 금융과 상품 거래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주식 거래, 해상 보험, 선물 거래 등 현대 금융의 기초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습니다.
영국은 이러한 네덜란드 모델을 학습하고 발전시켜, 18세기 이후 글로벌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했습니다. 런던은 암스테르담을 대체하여 세계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영국의 파운드화는 국제 기축통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한 17세기에 발전한 무역 네트워크와 물류 시스템은 현대 글로벌 물류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상품의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하는 복잡한 네트워크, 위험 관리를 위한 금융 시스템, 정보 흐름을 촉진하는 통신 체계 등은 모두 이 시기에 그 기초가 형성되었습니다.
결론: 17세기 영-네 해상 경쟁의 역사적 유산
17세기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상 물류 경쟁은 단순한 상업적 갈등을 넘어 근대 세계 질서와 글로벌 물류 체계 형성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양국은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걸친 광범위한 무역망을 구축하며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습니다.
네덜란드는 17세기 전반기에 혁신적인 선박 건조 기술, 효율적인 무역 시스템, 발달된 금융 제도를 기반으로 해상 무역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VOC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 무역 기업으로 성장하며 주식 시장과 현대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 확충과 적극적인 식민지 정책을 통해 점진적으로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경쟁은 단순한 상업적 마찰을 넘어 일련의 영-네 해상전쟁으로 격화되었고, 이는 글로벌 무역 구조와 식민지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발전한 무역 네트워크, 금융 시스템, 물류 관리 방식은 현대 글로벌 물류와 자본주의 경제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17세기 영-네 해상 경쟁의 유산은 오늘날 글로벌 무역 체계에 여전히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해운을 통한 글로벌 상품 유통, 국제 금융과 보험 시스템, 다국적 기업의 글로벌 네트워크 등은 모두 이 시기의 혁신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17세기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상 물류 경쟁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현대 글로벌 경제와 무역 체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사적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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